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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울어진 분석문이다

안양예술고등학교 1학년 송태양

「허공의 아이들」과 「물속 골리앗」을 보게 되면 같은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허공의 아이들」은 지상의 것이 땅에서 떠오르고 땅의 곳곳에 깊은 구덩이가 생기며 사람들이 투명해져 사라지는 이야기. 「물속 골리앗」은 홍수라는 재난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까?

「허공의 아이들」을 보자. 우리의 눈에 띄는 부분은 재난이 그려낸 상황이며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이 디스토피아라는 성격만은 아니라고 본다. 소설 속에서는 성장이 있다. 성장은 미래를 필요로 한다. 성장은 즉각적인 변화가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는 내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그런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시간이 흐를수록 미래는 파괴되어가고 점차 투명해진다. 이 소설의 역설적인 부분이다. 성장의 다른 부분으로 보면 투명해진다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변화하는 것 그 자체도 성장이다. 그로써 사라지는 미래로 성장하는 시간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장 부분에서 더 살펴보면 허공과 지면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허공의 세계인 지면이였던 것은 계속해서 지면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러면서 점차 디스토피아로 향해 나아가고, 이는 우리의 정신적 지면과도 같은 안정감과 가족과 같이 기반이 되었던 모든 것을 원래 자리를 거부하며 허공으로 솟는다. 이를 해석하면 지탱해줄 세계의 실종. 가깝지만 먼 그래서 허공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주인공들이 어리다는 것. 아직 미성숙한 상태이면서 그 성장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상태라는 것도 주된 부분인데, 어리숙한 청소년 혹은 어린이의 모습인 이들은 화합도 하고 분화하기도 하며 ‘퍼즐’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퍼즐 또한 작품에서도 완성되려고 하면 다시 처음이 되듯, 안정을 찾은 듯 하면 허공이 다가온다. 성장통의 고통을 느낀 우리라면 알리라. 단순 신체의 고통이 아니라 이 소설의 허공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소녀와 소년은 허공에 올라 시간을 보내다 소녀가 투명해진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이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녀는 허공 이전의 지면이었으며 소년에게는 허공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지면의 흔적이었으리라. 즉 이야기에서 소녀가 사라진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 그것을 느끼는 것인 성장통이며, 이제 퍼즐은 소년에 손에 남은 것. 제목인 「허공의 아이들」은 이런 것을 품은 게 아닐까 고민해본다.

「물속 골리앗」을 보면 홍수가 등장한다. 단순히 공상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한 재난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재난으로 그려진다. 물론 소설 속에서처럼 온 세계가 물에 잠기는 상황은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읽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서도 언제든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소설 속 상황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홍수는 앞선 지면처럼 의지하고 있는 집과 어머니를 나와 해체한다. 홍수에서 주의 깊게 들여다볼 점은 물의 부피 변화 앞의 아우라가 아니라, 홍수로 인한 인식과 정신의 파괴를 보여준다. 골리앗이 그것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데, 타워크레인을 골리앗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힘인 크레인이 자연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 골리앗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단한 거인으로 힘센 장사였으나 소년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 지배의 가까운 것이며 과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은 소설 속에서 홍수에 잠긴다. 또한 이것은 허무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선 소년을 살리기도 하는 방향으로, 지배자의 것으로, 과시로 보이나. 소년의 아버지 모습을 통해 와전된 의미로 결국 무력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대비의 극대화가 있는데 거대한 것과 작은 것, 문명과 자연, 힘과 방금 말한 무력함, 어른의 세계와 그걸 전부 알 수는 없는 아이, 안정된 삶과 생존이다. 주인공인 소년은 처음엔 금방 비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작은 방울들이 결국 무력한 세계를 만들고. 문명을 부순다. 생존. 소년은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왜일까? 그건 우리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속에서도 안정된 무언가를 짚고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답을 할 수 없다. 다시 생존. 그건 어른의 세계가 아닐까. 소년은 몇 번의 위기를 거치고 어딘가에 계속해서 안착한다. 하지만 그건 영원한 안착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물에 의해 뒤덮일 안착이다. 소년은 고민한다. 수면 아래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여기서 물 속의 골리앗을 생각해 봤다. 가장 크게 형상되고 드러나는 압도적인 크레인조차 작게 만드는, 무시하는 성격을 지닌 자연. 더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은 마치 다음 크레인이 있는 것과도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장 큰 크레인을 가지면 뭘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 소설이 극명한 빛을 비추지 않는 이유는 빛이라는 크레인이 있더라도 우리는 결국 마지막엔 홍수가 뒤덮을 크레인 위에서 무력함을 느낀다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은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인 위에 남는다. 크레인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홍수가 언제 올지 모르는 것. 그런 홍수가 언젠가 온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런 홍수가, 구름이 걷히는 언젠가가 있다고. 홍수 앞에서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울었다. 신에게 빌기도 해봤지만 닿지 않을 그의 울음이 홍수 속 한 모금이 되어 섞이고, 누군가 올 거야. 불확실하지만 확고한 대답. 확실히 선을 그어주지 않는 이 결말은 휘청일 미래를 향해 보여주는 완전한 회복은 아니라, 상처가 있고 기울어진 시선인 일종의 선(善)이 아닐까.

image 나는 기울어진 분석문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기울고 갈라진 선이 두 소설의 공통 지평선이다.

왼쪽은 지면에서 떠올라 사라지는 아이, 오른쪽은 홍수 속 크레인(‘골리앗’) 위에 남겨진 소년.

<삽화;손미숙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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